부여 당일치기 여행 중, 뜻밖의 건축물을 마주했다.
김수근이 설계한 옛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강의 슬라이드인지 책에선지 사진으로만 접했던 건물을 실물로 마주한 낯설고도 반가운 충격이었다.
부여박물관
연도_1965 위치_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 16-1 건축면적_654㎡ 연면적_1,080㎡ 구조_철근 콘크리트
kimswoogeun.org
1967년 준공된 이 건물은 서까래를 연상시키는 노출 콘크리트 구조와 맞배지붕, 전통과 현대가 혼합된 외관으로 눈길을 끈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분위기. 규모는 작지만 시각적 인상은 강렬하다. 세운상가, 공간사옥, 경동교회 등 서울에 위치한 김수근의 작품들은 여러번 방문하였지만, 부여에 위치한 이 건물을 보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이 건물은 1993년 국립부여박물관을 신축 이전하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 문화재 관련 기관의 사무공간으로 사용되다가 2018년부터 2024년까지는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으로 이용되었다. 내부 리모델링을 거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될 예정으로, 현재 폐관 상태여서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이 건물은 완공 당시부터 논쟁적이었다. 일본 신사를 연상시킨다는 ‘왜색 논란’이 이어졌다. 언론과 건축계 일부는 지붕과 정문이 일본 전통의 신사 양식과 닮았다고 지적했고, 김수근의 선배 건축가 김중업도 “명백한 일본식”이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수근은 “이것은 백제 양식도, 일본 신사의 양식도 아닌 김수근 양식”이라며 반박했다.
아래는 당시 신문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김중업(金重業) : 「전통없는 시사(神社)의 변형」
부여 박물관의 설계도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한마디로 말하면 이 건물은 일본 신사(神社)의 디포르메라는 인상이 확연하다.
내가 보건대 김군은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영향을 충분히 여과시켜서 내면화하고, 다시금 우리의 전통을 깊이 연구하고 정관(靜觀)하여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열었어야 하는 그의 과제를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중앙일보』1967년 9월 2일
김수근(金壽根) : 「신사(神社) 모방 아닌 내 것」
건축 예술의 역사는 여러 세기를 통해 구조와 장식의 수법으로써 기록되어 왔지만, 철과 콘크리트에 의한 무한한 구조 가능성의 확대는 지난 수십년 동안 과거의 양식을 철저히 전복해 왔으며, 현대 건축의 공법이 기존 양식을 표절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현대 감각을 가진 건축가라면 기존 양식을 모방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피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설계는 백제(百濟)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양식(神社樣式)도 아닌, 현대 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바로 김수근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동아일보』 1967년 9월 5일
결론적으로 심의 위원회는 지붕 용마루 돌출 부분을 일부 자르고 한식기와를 씌우는 등의 수정 의견을 개진하였고, 비판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수근 건축가는 이를 수용하여 개작하였다.
나는 건축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에 대한 내 의견을 드러내진 않겠지만, 故 이용재 평론가의 시각과 우려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위 논쟁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중앙일보 기사, 이용재 평론가 블로그, 김홍철 작가 브런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잘나가던 김수근 굴욕 안겼다…부여 뒤흔든 '왜색 논쟁' 건물 | 중앙일보
한국 건축사에서 이보다 더 논쟁적인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 또 있을까.
www.joongang.co.kr
부여박물관 왜색시비
당시 한국에서는 두 가지 부류에 저촉되면 완전히 사회에서 매장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나는 친일파라는 ...
blog.naver.com
건축가 김수근의 터닝포인트.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의 정체성 | 1967년 8월 19일. 동아일보에 한 기사가 뜬다. '일본 신사와 같다. 부여박물관 건축양식에 말썽' 백제유물을 보관할 목적으로 새로 지어질 부여박물관은 4천500만 원이라는
brunch.co.kr
어쨌든, 이 건축물은 더 이상 국립박물관이 아니고 여러 용도를 거쳐 2025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될 예정이다. 과거의 논쟁은 사라지고, 건물은 또 다른 쓰임을 준비 중이다.
이외에도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큰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건축물들이 떠오른다. (생각나는 것들만 적은 것이고 이외에도 이슈가 된 건축물들은 훨씬 많을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1968), 세운상가(1968), 국립극장(1973), 국회의사당(1975),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1993), 종로타워(1999),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2008), 광화문광장(2009), 세빛섬(2011), 서울시청 신청사(2012), 동대문디자인플라자(2014)
추후 기회가 된다면 이 건물들에 대해서도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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