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명확한 진로 없이 방황하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건축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 선택의 배경과 과정을 풀어본다.
나는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은 하락했고, 고3 중간고사 전날 밤을 PC방에서 보내고 학교에 간 적도 있다. 수능을 불과 며칠 앞두고도 부모님 몰래 몇 시간씩 게임을 했다. 내신은 기대 이하였고, 결국 수시로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정시로만 승부를 볼 수 있었고, 그렇게 중앙대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꿈이 없었다. 공부가 싫다기보다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목표가 없으니 동기부여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노력도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도 건축학과는 비교적 끌리는 선택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 시카고에 있는 친척 집에 한 달간 머문 적이 있다. 건축가였던 친척 할아버지의 지하 작업실, 그리고 서울보다 높고 아름다운 시카고의 도시 풍경이 인상 깊게 남았다. 건축가는 세련된 도시를 배경으로 멋진 건물을 설계하는, 그럴싸한 직업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쳐본 책 한 권도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에 관한 책이었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같은 불멸의 건축물을 남겼지만, 말년에는 검소한 삶을 살았고, 전차에 치이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 비극적인 최후가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독한 창조자의 이미지가 마음에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에게,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구조물을 창조하는 일은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건축학과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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